오스트리아 – 그라츠, 합스부르크의 심장을 걷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구시가지(Altstadt)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중세와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숨결이 온전히 보존된 곳입니다.

슈타이어마르크주의 활기찬 중심 광장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가 깃든 귀족들의 거리, 3만 점의 무기가 잠들어 있는 세계 최대의 무기고, 그리고 합스부르크 황실에 빵을 납품하던 500년 전통의 왕실 빵집까지 그라츠의 심장부를 따라 걷는 클래식 역사 산책을 시작합니다.

하웁트 플라츠의 요한대공 분수와 그 뒤로 보이는 헤렌가세. 저 멀리 슐로스베르크위의 시계탑도 보인다

1. 도시의 거실, 하웁트플라츠(Hauptplatz)와 요한 대공 분수

그라츠 여행의 시작점이자 심장부인 하웁트플라츠(중앙 광장)는 12세기 중세 시장 터로 형성된 이래 지금까지 도시의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광장을 굽어보는 시청사(Rathaus): 19세기 말 독일 역사주의 양식으로 개축된 웅장한 시청사가 광장 남쪽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 평민을 사랑한 귀족, 요한 대공 분수(Erzherzog-Johann-Brunnen): 광장 중앙에는 슈타이어마르크주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요한 폰 외스터라이히 대공(Erzherzog Johann)의 동상 분수가 우뚝 서 있습니다.
    • 합스부르크 황실의 일원이었던 그는 귀족 신분을 뛰어넘어 우체국장의 딸인 평민 여성 안나 플로흘(Anna Plochl)과 세기의 사랑을 나누어 결혼했습니다.
    • 요한 대공은 요아네움 박물관, 기술 대학교, 주립 도서관 등을 설립하며 그라츠의 산업·문화·교육 현대화를 이끌어 ‘주민들의 대공’으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동상 아래를 둘러싼 4개의 여성 조각상은 당시 슈타이어마르크 지역을 흐르던 4대 강(무어, 엔스, 드라우, 잔)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2. 귀족들의 거리 ‘헤렌가세(Herrengasse)’와 르네상스의 걸작 ‘란트하우스(Landhaus)’

하웁트플라츠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시원하게 뻗은 헤렌가세(신사/귀족들의 거리)는 과거 귀족과 유력 인사들의 저택이 밀집해 있던 그라츠 최고의 메인 스트리트입니다.

  • 칠해진 집(Gemaltes Haus): 헤렌가세 3번가에 위치한 이 건물은 외벽 전체가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들의 프레스코화로 화려하게 뒤덮여 있어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습니다.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수, 란트하우스(Landhaus): 16세기 슈타이어마르크주 의사당으로 건립된 란트하우스는 북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탈리아 건축가 도메니코 델랄리오(Domenico dell’Allio)가 설계한 3층 구조의 아치형 회랑 안뜰(Innenhof)은 마치 피렌체의 궁전에 들어온 듯한 우아함을 자아내며, 섬세한 청동 분수와 회랑의 격자무늬 철제 난간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합니다.

3. 오스만 튀르크를 막아낸 세계 최대의 무기고, 란데스초이그하우스(Landeszeughaus)

란트하우스 바로 옆에는 그라츠가 유럽의 방파제였음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역사적 유적인 주립 무기고(Landeszeughaus)가 있습니다.

  • 실전 무기 3만 점의 보물창고: 17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잦은 침공에 대비해 일반 시민과 민병대를 신속하게 무장시키고자 지은 무기 창고입니다.
  • 시간이 멈춘 무기고: 갑옷, 투구, 칼, 창, 초기 화승총, 대포 등 약 32,000점의 실전 무기가 박물관 형태가 아닌 17세기 당시 창고 선반에 보관되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며 지방 무기고를 통폐합하려 했을 때, 슈타이어마르크 귀족들이 “용맹한 조상들의 역사를 기리는 기념물로 남겨달라”고 간청하여 기적적으로 파괴를 면하고 오늘날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적 무기고로 남게 되었습니다.

4. 합스부르크 황실의 입맛을 사로잡은 500년 전통, 호프베케라이 에데거-탁스(Hofbäckerei Edegger-Tax)

하웁트플라츠에서 호프가세(Hofgasse) 골목을 따라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목조 조각 파사드를 마주하게 됩니다. 1569년부터 문을 연 그라츠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이자 황실 납품 빵집 ‘호프베케라이 에데거-탁스’입니다.

  • 황실 조달 허가(k.u.k. Hoflieferant): 188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그라츠를 방문했을 때 이곳의 빵 맛에 반해 황실 공식 조달 업체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가게 입구 위에는 당시의 영광을 증명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상징 쌍두독수리(Doppeladler) 문장이 정교한 오크나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 1880년대의 고풍스러운 목조 파사드: 목수 안톤 이르시크(Anton Irschik)가 정교하게 조각한 너도밤나무 및 참나무 파사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며, 오랜 세월 동안 원형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 역사가 담긴 전통 과자:
    • 호프페퍼뉘세(Hofpfeffernüsse): 18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비밀 레시피로 만든 전통 향신료 쿠키로, 은은한 향과 부드러운 단맛이 일품입니다.
    • 시시의 키스(Sissi-Küsse): 황후 엘리자베트(시시)에게 헌정된 고급 초콜릿 디저트로,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미를 자랑합니다.
    • 슈타이어마르크 호박씨 빵: 지역 특산물인 호박씨를 듬뿍 넣어 구워낸 고소하고 담백한 전통 빵도 현지인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대표 메뉴입니다.

5. 골목끝에서 만나는 황실의 기적

그라츠 대성당 (Grazer Dom)과 마우솔레움 (Mausoleum)

  •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세운 고딕 양식의 궁정 성당과, 그 옆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자신의 안식처로 건립한 매장지(영묘)입니다.
  • 관전 포인트: 대성당 외벽에는 1480년 그라츠를 덮친 3대 재앙(메뚜기 떼, 흑사병, 튀르크 침략)을 신의 징벌로 묘사한 귀중한 프레스코화 ‘신의 재앙 벽화(Gottesplagenbild)’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옆 마우솔레움은 이탈리아 매너리즘과 초기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웅장한 돔 아래 페르디난트 2세와 황실 가족들의 붉은 대리석 석관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라츠 구 궁전 (Grazer Burg)과 이중 나선형 계단 (Doppelwendeltreppe)

  • 프리드리히 3세와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거주했던 옛 황실 관저(현재는 슈타이어마르크 주 총리 집무실)입니다.
  • 관전 포인트: 안뜰 구석에 위치한 1499년 완공된 ‘이중 나선형 계단’은 후기 고딕 석조 건축의 기적이라 불립니다. 두 개의 계단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올라가다가 층마다 만나고 다시 갈라지는 구조로, ‘화해의 계단(Treppe der Versöhnung)’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여행자를 위한 구시가지 도보 여행 + 가까운 외곽 탐방 실전 팁

  • 구시가지 도보 동선 추천
    • 하웁트플라츠(중앙 광장 & 요한 대공 분수)헤렌가세(칠해진 집 & 란트하우스 안뜰)주립 무기고호프가세 골목의 호프베케라이 에데거-탁스 → 구 궁전/대성당(시간이 여유있는 여행자에게 추천) 순서로 이동하면 도보 10~15분 거리 + 트램15분 내내에서 알차게 둘러볼 수 있습니다.
  • 무기고 관람 팁
    • 내부에 냉난방 시설이 없는 역사 건축물이므로, 여름에는 다소 덥고 겨울에는 쌀쌀할 수 있으니 옷차림에 유의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부 설명이 필요한 경우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하면 층별 전시물의 역사적 배경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에데거-탁스 베이커리 카페 이용
    • 빵집 내부에는 아담한 카페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고풍스러운 비엔나식 멜랑쥐(Melange) 커피 한 잔과 함께 18세기 전통 페퍼뉘세 쿠키나 타르트를 곁들이며 중세 골목의 정취를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 헤렌가세 트램 무료 구간 (Altstadtbim)
    • 하웁트플라츠와 헤렌가세를 관통하는 트램 노선 중 주요 구시가지 중심 구간(자크스트라세~야코미니플라츠 등)은 누구나 무료로 탑승할 수 있어 다리가 피로할 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 에겐베르크 성 (Schloss Eggenberg)
    • 그라츠 서쪽에 위치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합스부르크 황실의 최측근이자 재상이었던 한스 울리히 폰 에겐베르크(Hans Ulrich von Eggenberg)가 건립한 궁전입니다.
    • 우주론과 천문학적 질서를 건축에 반영했습니다. 1년을 뜻하는 365개의 창문, 4계절을 상징하는 4개의 탑, 24시간을 나타내는 각 층의 24개 방 등 완벽한 천문학적 비례를 자랑합니다. 성 내부의 화려한 행성의 방(Planetary Room)과 정원에서 자유롭게 거니는 공작새들이 유명합니다.
  • 요아네움 박물관 (Universalmuseum Joanneum / Neue Galerie)
    • 1811년 요한 대공이 자신의 사재와 방대한 수집품을 기증하여 설립한 오스트리아 최초의 공공 박물관입니다.
    •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계몽주의와 학문·예술 후원 열정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현재는 중앙박물관, 노이에 갈레리(근현대 미술관), 자연사 박물관 등 그라츠 전역에 흩어진 10여 개 전시관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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