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 그라츠, 요새의 탄생과 슐로스베르크 악마의 전설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 그라츠(Graz)는 흔히 ‘녹음과 붉은 지붕의 도시’, ‘디자인의 수도’로 불립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도시의 중심에는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무력으로 함락된 적 없는 거대한 바위산, 슐로스베르크(Schloßberg, 성산)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평화로운 중세 풍경 아래 숨겨진 도시의 시작과 악마의 전설, 그리고 시민들의 자부심이 서린 시계탑의 비화를 소개합니다.

1. ‘작은 요새’에서 시작된 유럽의 방파제

그라츠라는 도시 이름의 어원은 6~7세기경 이 지역에 정착했던 남슬라브족의 언어 ‘그라덱(Gradec)’에서 유래했습니다. ‘작은 성’ 혹은 ‘작은 요새’를 뜻하는 이 이름은 무어(Mur)강 옆에 우뚝 솟은 천혜의 자연 요새, 슐로스베르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 바벤베르크 가문과 무역 거점: 12세기 바벤베르크 가문의 통치 아래 상업과 무역의 요충지로 성장한 그라츠는 1379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내오스트리아(Innerösterreich) 수도가 되며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 불패의 철옹성: 16세기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유럽 심장부로 진격할 당시, 그라츠는 서유럽 기독교 세계를 지키는 최전방 방파제였습니다. 이탈리아 최고의 건축가 도메니코 델랄리오(Domenico dell’Allio)가 슐로스베르크의 방어벽을 르네상스식 요새로 개축했고, 이 요새는 기네스북에 ‘역사상 단 한 번도 적에게 함락되지 않은 최강의 요새’로 등재될 만큼 난공불락의 위용을 떨쳤습니다.

2. 쇠클산(Schöckl)의 악마가 떨어뜨린 거대한 바위

그라츠 시내 한복판에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돌산이 솟아오르게 되었을까요? 현지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유쾌하고 흥미진진한 설화가 있습니다.

옛날, 그라츠 북쪽에 위치한 해발 1,445m의 험준한 산 쇠클(Schöckl)에는 사악한 악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악마는 그라츠 주민들이 날이 갈수록 신앙심이 깊어지고 착하게 살아가는 꼴을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분노한 악마는 그라츠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부활절 일요일, 쇠클산 꼭대기에서 집채만 한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떼어내 양손에 들고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그라츠 시내 한가운데로 바위를 내던져 도시를 통째로 짓밟아버릴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라츠 상공에 도착했을 때, 악마는 지상에서 화려하고 경건하게 행진하는 부활절 행렬을 목격했습니다. 순간 거룩한 찬송가 소리와 십자가의 광채에 화들짝 놀란 악마는 손에 쥐고 있던 거대한 바위를 그만 그라츠 시내 한복판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떨어진 바위 덩어리가 바로 오늘날의 슐로스베르크이며, 바위가 깨져 튀어나간 작은 파편 하나는 도시 남쪽에 떨어져 칼바리엔베르크(Kalvarienberg, 갈보리산)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3. 거꾸로 가는 시계탑과 나폴레옹을 이긴 시민들

슐로스베르크의 가장 높은 곳에는 그라츠의 랜드마크인 시계탑(Uhrturm)이 있습니다. 13세기 요새의 일부로 지어져 1560년경 현재의 모습을 갖춘 이 탑에는 두 가지 특별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긴 바늘이 시간, 짧은 바늘이 분? 시계탑의 시계판을 자세히 보면 현대 시계와 바늘의 역할이 정반대입니다.

  • 긴 바늘: 시간(Hour)
  • 짧은 바늘: 분(Minute)

초기 시계탑이 세워졌을 때는 오직 ‘시간’을 가리키는 거대한 바늘 하나뿐이었습니다. 성벽 아래 멀리 있는 시민들과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먼 거리에서도 한눈에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가장 크고 긴 바늘로 시간을 표시한 것입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분’을 표시하는 작은 바늘이 추가되면서 오늘날의 독특한 반전 구조가 완성되었습니다.

나폴레옹도 무너뜨리지 못한 사랑 1809년 쇤브룬 조약 당시,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킨 나폴레옹은 끝내 무력으로 함락하지 못한 슐로스베르크 요새를 철저히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폭파되는 비극 속에서, 그라츠 시민들은 시계탑과 타종탑(Glockenturm)만은 살려달라며 거액의 몸값(당시 화폐로 2,987 굴덴)을 모아 프랑스 군대에 전달했습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붉은 지붕 바다를 내려다보는 이 아름다운 시계탑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지상의 성벽에서 지하의 방패로: 5만 명을 살린 슐로스베르크 터널

4. 바위산 속 거대 방공호: 슐로스베르크 슈톨렌(Schloßbergstollen)

1809년 나폴레옹에 의해 지상의 요새는 허물어졌지만, 이 거대한 바위산은 약 130년 뒤 다시 한번 그라츠 시민들의 목숨을 지키는 지하 방패가 되었습니다.

1) 연합군의 공습과 방공호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라츠는 철도 요충지이자 전차, 항공기 부품,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 산업 거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1943년부터 연합군의 집중적인 전략 폭격 표적이 되었고, 시 당국은 단단한 백운암 암반 내부를 뚫어 대규모 방공호 네트워크를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뚫린 터널은 총연장 약 6.3km, 출입구만 20개 이상에 달했습니다.

2) 5만 명의 시민을 구한 지하 도시 공습경보가 울리면 최대 4만~5만 명의 시민이 동시에 이 지하 암반 터널로 몸을 피했습니다. 내부에는 단순한 대피로를 넘어 통신실, 지휘소, 심지어 응급 수술이 가능한 지하 병원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종전까지 그라츠 시내에 약 16,000톤의 폭탄이 쏟아져 도시가 파괴되는 참상 속에서도, 단단한 바위 속에 숨은 수많은 시민들은 기적처럼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3) 전후의 방치에서 문화·관광 공간으로의 변신 전쟁 후 오랫동안 폐쇄되거나 저장고로 방치되었던 터널은 현대에 이르러 그라츠의 혁신적인 도시 재생 감각을 보여주는 명소로 재탄생했습니다.

  • 슬라이드 그라츠 (Schlossberg Rutsche): 지하 엘리베이터 타워를 휘감고 내려오는 64m 높이의 세계 최장 실내 미끄럼틀
  • 슐로스베르크 엘리베이터 (Schlossberglift): 터널 내부를 관통해 정상 시계탑까지 30초 만에 오르는 수직 유리 엘리베이터
  • 돔 임 베르크 (Dom im Berg): 2003년 유럽 문화수도를 기념해 거대한 암반 동굴을 개조한 음향 특화 공연·전시 홀
  • 동화 열차 (Grazer Märchenbahn): 터널 일부 구간을 달리며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족용 테마 열차

5. 여행자를 위한 슐로스베르크 방문 실전 팁

  • 올라가는 세 가지 방법
    • 도보 (Schlossbergstiege): 슐로스베르크 광장(Schloßbergplatz)에서 지그재그로 바위를 깎아 만든 260개의 계단을 오르는 코스입니다. 시야가 탁 트여 사진 명소이지만 경사가 꽤 가파릅니다.
    • 푸니쿨라 (Schlossbergbahn): 카이저-프란츠-요제프 카이(Kaiser-Franz-Josef-Kai)에서 탑승하며, 최대 경사 61도의 궤도 열차를 타고 3분 만에 정상 테라스까지 오릅니다 (대중교통 티켓 적용 가능).
    • 엘리베이터 (Schlossberglift): 산 내부 방공호 터널로 들어가 수직으로 솟은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계탑 바로 밑까지 단숨에 올라갑니다.
  • 최적의 방문 시간대
    • 해 질 무렵(일몰 1시간 전) 방문을 추천합니다.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드는 구시가지의 테라코타 지붕들과 유유히 흐르는 무어강, 미래지향적인 쿤스트하우스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골든아워입니다.
  • 이색 어트랙션 (Schlossberg Rutsche)
    • 산 정상에서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 타워를 휘감고 내려오는 64m 높이의 실내 미끄럼틀을 타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입니다. 전용 매트를 타고 지하 터널 바닥까지 약 40초 만에 짜릿하게 내려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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