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남보헤미아주에 위치한 체스키 크룸로프(Český Krumlov)는 블타바강(Vltava)이 S자로 굽이쳐 흐르는 암벽 위에 세워진 동화 같은 도시입니다. 199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중세 고딕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동화같은 이 성곽마을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요?
1. 도시를 지배하고 번영시킨 4대 귀족 가문
1) 비트코프(Vítkovci) 가문 – (13세기 중반 ~ 1302년)
블타바강의 굽이진 지형을 기반으로 최초의 고딕 양식 성채를 축조했습니다. 비트코프 가문의 상징이었던 장미 문양은 도시 역사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12세기 남보헤미아의 막강한 영주였던 비테크 1세(Vítek z Prčice)는 세상을 떠나기 전 다섯 아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때 아들들에게 각기 다른 색깔의 ‘다섯 잎 장미(Five-petalled Rose)’ 문장을 하사했다는 유명한 전설이 전해집니다.
- 첫째 아들 (크룸로프 분파): 녹색 장미 문장 → 크룸로프 성 축조
- 둘째 아들 (로젠베르크 분파): 붉은 장미 문장 → 로젠베르크 성 축조 후 가문 번창
- 셋째~다섯째 아들: 은색, 파란색, 검은색 장미 문장 (흐라데츠, 란슈테인 등 다른 남보헤미아 영지로 분파)
즉, ‘크룸로프 가문’과 ‘로젠베르크 가문’은 모두 비트코프 가문이라는 같은 혈통에서 출발한 방계 가문이었습니다.
13세기 중반 체스키 크룸로프에 고딕 양식의 첫 성채를 지었던 것은 크룸로프 가문이었습니다.
- 대의 단절 (1302년): 1302년, 크룸로프 가문의 마지막 영주였던 보코(Vok z Krumlova)가 후계자(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크룸로프 분파의 혈통이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 로젠베르크 가문의 영지 흡수: 당시 보헤미아 국왕이었던 바츨라프 2세(Václav II)의 승인을 받아, 가장 가까운 친척 가문이자 같은 비트코프 혈통이었던 로젠베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1세(Jindřich I. z Rožmberka)가 크룸로프 성과 영지를 정식으로 물려받았습니다.
- 본거지 이전: 하인리히 1세는 가문의 중심 본거지를 기존의 로젠베르크 성에서 지리적·군사적 요충지였던 체스키 크룸로프 성으로 이전했습니다.
2) 로젠베르크(Rosenberg) 가문이 연 300년의 황금기 (1302~1601)
체스키 크룸로프의 최대 황금기를 이끈 보헤미아 최고의 명문가입니다. 성을 르네상스 양식의 대규모 궁전으로 개축하고, 인문학·예술·양조업을 발전시켜 남보헤미아의 정치·문화 중심지로 번영시켰습니다.
영지를 상속받은 로젠베르크 가문은 단순한 상속에 그치지 않고, 체스키 크룸로프를 보헤미아 왕국에서 프라하 다음으로 강력한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 성의 대규모 확장: 페트르 1세(Petr I)와 하인리히 1세는 기존의 작은 요새 위에 ‘상성(Upper Castle)’을 증축하고 성 비투스 대성당 등을 건립했습니다.
- 르네상스 궁전으로의 변모: 16세기 후반, 빌렘(Vilém z Rožmberka) 영주 시절 이탈리아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대거 영입하여 중세 고딕 요새였던 성을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으로 개축했습니다.
- 상징의 계승: 로젠베르크 가문은 자신들의 상징인 ‘붉은 다섯 잎 장미’를 도시와 성 곳곳에 새겼으며, 이는 오늘날 체스키 크룸로프의 공식 시문장(City Emblem)과 매년 열리는 ‘다섯 잎 장미 축제’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역사 비하인드: 오타카르 2세의 견제와 체스케 부데요비체]
남보헤미아에서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키우던 비트코프 가문(로젠베르크 가문 등)을 견제하기 위해, 13세기 보헤미아의 국왕 프르셰미슬 오타카르 2세(Přemysl Otakar II)가 전략적으로 건설한 왕립 도시가 바로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북쪽으로 약 24km 떨어진 체스케 부데요비체(České Budějovice – 오리지널 버드와이저 ‘부드바르’ 맥주의 본고장)입니다.
① 배경: 강력한 왕권과 남보헤미아 호족의 충돌
- ‘철과 황금의 왕’ 오타카르 2세: 오타카르 2세는 군사력(철)과 막대한 재력(황금)을 바탕으로 영토를 오스트리아와 아드리아해 연안까지 확장하며 보헤미아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강력한 군주였습니다.
- 비트코프/로젠베르크 가문의 급성장: 남보헤미아 일대는 비트코프 가문(크룸로프, 로젠베르크 가문 등)이 광활한 영지와 은광, 무역로를 장악하며 독자적인 왕국처럼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② 체스케 부데요비체 건설 (1265년)
남보헤미아에서 가문의 영향력이 국왕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자, 오타카르 2세는 이들을 군사적·경제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교두보를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 지리적 요충지 선정: 블타바강과 말셰(Malše)강이 만나는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에 1265년 체스케 부데요비체를 왕립 도시(Royal City)로 건설했습니다.
- 견제 목적: 로젠베르크/비트코프 가문의 영지 한복판에 강력한 왕립 요새 도시를 박아 넣어, 이들의 무역로를 차단하고 세력 확장을 물리적으로 억누르고자 했습니다.
- 즐라타 코루나 수도원 설립 (1263년): 도시 건설 2년 전, 오타카르 2세는 체스키 크룸로프 바로 인근에 왕립 시토회 수도원인 즐라타 코루나(Zlatá Koruna)를 세워 종교적·영토적 영향력까지 침투시켰습니다.
③ 비트코프 가문의 무력 반발과 충돌
오타카르 2세의 노골적인 견제에 비트코프 가문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 도시 약탈과 방화 (1277년경): 비트코프 가문의 자비시(Záviš z Falkenštejna)를 중심으로 한 귀족 연합군은 오타카르 2세가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와 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 체스케 부데요비체와 즐라타 코루나 수도원을 공격해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 결과: 비록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지만, 체스케 부데요비체는 이후 왕실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맥주 양조와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해 남보헤미아에서 로젠베르크의 세력을 제어하는 핵심 거점 역할을 지속했습니다.
[로젠베르크 가문의 몰락과 합스부르크로의 매각]
막강한 권세를 누리며 300년 황금기를 구가하던 로젠베르크 가문 역시 17세기 초에 이르러 쓸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 막대한 부채: 화려한 르네상스식 궁정 생활, 연금술사 후원, 광산 사업 투자 실패 등으로 가문은 막대한 빚을 졌습니다.
- 합스부르크에 매각 (1601년): 빌렘의 동생이자 마지막 영주였던 페트르 보크(Petr Vok)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1601년 체스키 크룸로프 성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루돌프 2세(Rudolf II)에게 매각했습니다.
- 가문의 단절 (1611년): 페트르 보크 또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1611년 트르제본(Třeboň)에서 사망하면서, 300년 넘게 남보헤미아를 호령하던 로젠베르크 가문 역시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루돌프 2세는 자신의 사생아 율리우스 왕자를 이 성으로 보냈고, 그 시기에 바로 ‘이발사의 다리’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3) 에겐베르크(Eggenberg) 가문 – (1622년 ~ 1719년)
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황제(페르디난트 2세)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공로로 에겐베르크 가문이 합스부르크가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았습니다. 궁정 바로크 문화를 이식하며 세계적인 바로크 극장 건축을 주도했습니다.
4) 슈바르첸베르크(Schwarzenberg) 가문 – (1719년 ~ 1947년)
영지를 상속받아 바로크 극장을 확장 완공하고, 망토 다리(Cloak Bridge) 등 상징적 건축물을 정비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유화되기 전까지 도시를 관리했습니다.
2. 체스키 크룸로프 성(Český Krumlov Castle)과 성탑(Castle Tower)
1) 건축 양식의 변천: 고딕 요새에서 바로크 궁정까지
체스키 크룸로프 성은 프라하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채 복합 단지(총 5개의 안뜰과 40여 개의 건물)입니다. 13세기 중세 고딕 요새로 출발하여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완공되었습니다.
- 13세기 중반 (고딕 양식): 비트코프 가문(크룸로프 분파)이 험준한 바위 절벽 위에 군사적 방어 목적으로 작은 요새(하성, Hrádek)와 원통형 탑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 14세기 (고딕 확장): 영지를 상속받은 로젠베르크 가문이 더 넓은 바위산 쪽에 ‘상성(Horní hrad)’을 신축하며 궁전 형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 16세기 후반 (르네상스 대개축): 빌렘 폰 로젠베르크(Vilém z Rožmberka) 시대에 이탈리아 출신 궁정 건축가 안토니오 에리세라(Antonio Ericera)와 발다사레 마기(Baldassare Maggi)를 영입했습니다. 어둡고 투박했던 중세 고딕 요새는 화려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식 르네상스 궁전으로 전면 개축되었습니다.
- 17~18세기 (바로크 및 로코코 양식): 에겐베르크 가문과 슈바르첸베르크 가문을 거치며 세계적인 바로크 극장, 3층 구조의 망토 다리(Cloak Bridge), 거대한 바로크식 성 정원(Castle Garden)과 여름 별궁(Bellaria)이 추가되며 화려한 바로크 복합체로 완성되었습니다.
2) 도시의 상징, ‘성탑(Zámecká věž)’의 역사와 변천
체스키 크룸로프 어디서나 눈에 띄는 화려한 원통형 탑은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의 시대적 변화를 층별로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19세기 체코의 대문호 카렐 차페크(Karel Čapek)는 이 탑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탑다운 탑(Věž nejvěžovatější)”이라 칭송했습니다.
- 하부 구조 (13세기 고딕): 지상과 가까운 탑의 1~2층은 13세기 크룸로프 가문이 축조한 단단하고 묵직한 고딕 양식의 원형 석조 구조입니다.
- 상부 증축 (16세기 르네상스): 1580년대 빌렘 영주가 탑의 높이를 총 54.5m(86m 바위 절벽 기준)로 대폭 높이고, 최상부에 르네상스식 아케이드 회랑과 종탑을 올렸습니다.
- 1590년 외벽 채색 (마니에리스모/르네상스): 화가 바르톨로메우스 베라네크(Bartholomaeus Beránek, 별칭 옐리네크)가 탑 외벽 전체에 환상적인 벽화를 그렸습니다. 입체적인 조각품처럼 보이게 하는 ‘트롱프뢰유(Trompe-l’œil, 착시 그림)’ 기법을 적용하여 12궁도 천문 기호, 르네상스식 기둥, 환상적인 인물상들을 채색했습니다. (현재의 색채는 1990년대 복원 작업을 통해 되살려낸 것입니다.)
3) 성 내부 안뜰 외벽의 특징: ‘스그라피토’와 ‘착시 벽화’
체스키 크룸로프 성의 제3안뜰과 제4안뜰(상성 구역)에 들어서면 사방을 둘러싼 외벽 전체가 거대한 미술관처럼 르네상스 예술로 채워져 있습니다.
- 스그라피토(Sgraffito) 기법: 젖은 흑색/회색 회반죽 위에 흰색 석회 반죽을 덧바른 뒤, 겉면을 긁어내어(Scratch) 아래층의 어두운 색을 드러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장식 기법입니다. 성 벽면 전체에 입체적인 다이아몬드형 돌벽(치석 패턴)을 깎아 쌓은 듯한 착시 효과를 연출했습니다.
- 그리자유 및 트롱프뢰유 벽화: 평평한 벽면에 음영과 원근법만을 정교하게 사용하여 입체적인 아치창, 대리석 기둥, 틈새 감실(Niche), 그리고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들과 영웅 조각상이 실제로 서 있는 것처럼 벽화를 그려 넣었습니다.
- 외벽을 벽화로 마감한 현실적 이유:
- 비용 절감과 시공 속도: 값비싼 대리석을 멀리서 채굴해 운반하고 조각가를 고용해 벽을 깎는 것보다, 평평한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시간과 비용 면에서 훨씬 효율적이었습니다.
- 이탈리아 유행 수용: 당시 남유럽 르네상스 귀족 사회에서 유행하던 ‘지적이고 세련된 착시 미술’을 과시하여 가문의 부와 예술적 안목을 대외에 자랑하려는 의도였습니다.
3. 체스키 크룸로프 성의 곰 사육 역사
체스키 크룸로프 성 입구의 깊은 해자(Castle Moat)에는 16세기부터 현재까지 실제 갈색 곰이 살고 있습니다.
- 로마 명문가 오르시니(Orsini)와의 혈통 주장: 로젠베르크 가문의 수장이었던 빌렘(Vilém z Rožmberka)은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이탈리아의 유력 가문 오르시니와 친척 관계라 주장했습니다. 이탈리아어로 곰을 뜻하는 ‘Orso’에서 유래한 오르시니 가문의 상징에 맞춰, 가문 문장에 곰을 넣고 16세기 후반부터 성 안뜰과 해자에서 곰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 해자의 방어 기능과 곰 사육: 1707년 에겐베르크 가문 통치기부터 해자에 곰을 정식 방사했습니다. 초기에는 침략자를 막는 군사적 방어 수단이었으나 점차 상징적 전통으로 정착했습니다.
- 현대적 동물 복지: 오늘날 해자에는 전문 사육사가 상주하며 곰을 돌보고 있으며, 매년 크리스마스와 생일에는 축제를 열어 과일 케이크를 선물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4. 세계에서 가장 온전한 ‘바로크 극장’
체스키 크룸로프 성의 바로크 극장(Castle Baroque Theatre)은 스웨덴의 드로트닝홀름 극장과 함께 원형 그대로 보존된 전 세계 단 2곳뿐인 바로크 실내 극장 중 하나입니다.
- 완벽한 보존 상태: 1680년대 에겐베르크 가문이 건립하고, 1766년 화재 후 슈바르첸베르크 가문이 재건했습니다. 당시의 무대 배경막, 슬라이딩 시스템, 500벌 이상의 의상, 음향 효과 장치(천둥·바람 기계), 샹들리에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 목재 기계 장치(Machinery): 무대 아래의 도르래와 목재 윈치를 수동 조작하여 1분 안에 바다에서 숲속으로 배경 세트를 통째로 전환하는 18세기 무대 메커니즘을 작동 가능한 상태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 보존 관리: 유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일반 관광객에게는 제한된 인원만 가이드 투어로 공개되며, 매년 축제 기간에만 촛불 조명 아래 오페라 공연이 상연됩니다.
5. 이발사의 다리(Lazebnický Most)에 얽힌 비극
구시가지와 성 아래 라트란(Latrán) 지구를 연결하는 목조 다리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기였던 17세기 초의 비극적인 설화가 깃들어 있습니다.
- 루돌프 2세의 사생아, 율리우스 왕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는 정신질환(조현병)과 광폭한 성향을 보인 사생아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우스트리아(Don Julius Caesar d’Austria)를 격리하고자 1605년 체스키 크룸로프 성으로 보냈습니다.
- 이발사의 딸 마르케타와의 만남: 율리우스 왕자는 다리 근처에서 이발관을 운영하던 이발사의 딸 마르케타(Markéta Pichlerová)에게 집착하여 첩으로 삼았습니다.
- 참극과 누명: 왕자의 광기 어린 학대를 피해 마르케타가 도망쳤으나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성으로 돌아갔고, 1608년 사육제 기간에 율리우스 왕자는 마르케타를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 주민들의 희생과 왕자의 최후: 범행 직후 실성한 왕자는 성 밖 주민들이 범인이라며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매일 다리 위로 끌고 가 처형했습니다. 결국 딸을 잃은 이발사가 주민들의 학살을 멈추기 위해 거짓 자백을 하고 처형당했습니다. 이후 충격을 받은 루돌프 2세는 율리우스를 성의 탑에 감금했고, 왕자는 1년 뒤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발사와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이 다리를 ‘이발사의 다리’라 불렀으며, 다리 위에는 성 요한 네포무크(St. John of Nepomuk) 조각상과 예수 십자가상이 세워져 영혼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6. 물에 빠진 사람의 수호성인, 성 요한 네포무크(St. John of Nepomuk)
체스키 크룸로프의 이발사의 다리뿐만 아니라 프라하의 카를교, 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의 장크트 길겐(St. Gilgen) 등 중부·동유럽의 수많은 다리와 호숫가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성 요한 네포무크(St. John of Nepomuk / Jan Nepomucký)에 관해 알아볼까요?
1)성 요한 네포무크는 누구인가?
- 출생과 배경: 1345년경 보헤미아 서부 포무크(Pomuk, 훗날 네포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 지위: 프라하 대학교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교에서 교회법을 전공한 엘리트 성직자로, 프라하 대주교 얀 폰 옌슈테인(Jan z Jenštejna)의 총대리(Vicar-General)이자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의 참사회원이었습니다.
2) 1393년 프라하 카를교 순교 사건의 전말
성 요한 네포무크의 순교 배경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고해성사 비밀 유지’ 전설과 당시 ‘정치·종교 권력의 충돌’이라는 두 가지 층위가 공존합니다.
① 대중적 전설: 왕비의 고해성사 비밀 준수
당시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바츨라프 4세(Václav IV)는 의처증과 폭력적인 성향이 심했습니다. 그는 아내인 조피 왕비(Queen Sophia)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왕비의 고해사제였던 얀 네포무츠키를 불러 고해 내용을 털어놓으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해성사의 비밀은 하느님과의 약속이므로 목숨을 잃더라도 결코 누설할 수 없다”며 국왕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②역사적 배경: 세속 권력과 교권의 대립
역사학적으로는 클라드루비(Kladruby) 수도원의 새 원장 임명권을 둘러싸고 왕권을 강화하려던 바츨라프 4세와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던 프라하 대주교청 사이의 극심한 정치적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대주교의 오른팔이었던 네포무크는 왕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결정을 내렸고, 분노한 바츨라프 4세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③고문과 블타바강 투척
1393년 3월 20일, 분노한 바츨라프 4세는 네포무크를 직접 체포하여 불로 지지는 등 잔혹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숨이 끊어져 가자 왕은 야밤에 그의 손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린 채 프라하 카를교 위에서 블타바강으로 던져 익사시켰습니다.
3) 다섯 개의 별과 기적의 전설
그가 차가운 강물에 빠져 익사한 직후, 어두운 강물 위로 다섯 개의 황금빛 별(빛무리)이 떠올라 시신이 떠 있는 자리를 환하게 비추었다는 기적이 전해집니다.
- 별 5개의 상징: 라틴어 TACUI(“나는 침묵했다”라는 뜻)의 5개 철자를 상징합니다.
- 조각상의 도상학적 특징:
- 머리 뒤에 5개의 별이 달린 후광(Halo)이 둘러져 있습니다.
- 한 손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십자가와 종려나무 가지(순교의 상징)를 안고 있습니다.
- 다른 한 손의 검지를 입술에 대고 있는 모습(침묵과 비밀 유지)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4) 왜 ‘물에 빠진 사람과 다리의 수호성인’이 되었는가?
성 요한 네포무크가 물(강)에 던져져 순교했기 때문에, 가톨릭 전통에 따라 ‘자신이 겪은 고통으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성인’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물과 관련된 재난의 수호자: 강물에 빠져 익사할 위기에 처한 사람, 홍수와 범람으로 인한 수해, 뱃사람과 어부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성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 다리의 수호자: 과거 중세와 근대의 다리는 홍수로 자주 유실되고 건너다 추락하기 쉬운 위험한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다리를 건너는 여행자의 안전을 지키고 다리가 무너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다리 난간 중앙에 그의 조각상을 세우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 명예와 비밀의 수호자: 물뿐만 아니라 억울한 누명, 비방, 사생활 침해로부터 명예를 지켜주는 성인이기도 합니다.
5) 중부·동유럽 전역(오스트리아, 잘츠카머구트 등)으로 퍼진 배경
프라하의 지역 성자였던 그가 체코를 넘어 오스트리아(잘츠카머구트 장크트 길겐 등), 독일 남부, 헝가리, 폴란드 등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 널리 퍼진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 합스부르크 가문과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17~18세기 합스부르크 황실과 가톨릭 예수회는 개신교(후스파)의 기세를 꺾고 가톨릭 신앙을 재결집하기 위해 강력한 가톨릭 영웅이 필요했습니다. 1729년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Canonization)되자, 합스부르크 황실은 제국 영토 전역에 대대적으로 그의 성상을 세우도록 장려했습니다.
- 호수와 강이 많은 지형적 특성:
- 잘츠카머구트의 볼프강 호수(Wolfgangsee)변에 위치한 장크트 길겐(St. Gilgen)이나 할슈타트 같은 마을들은 예로부터 어업, 소금 운반선(목선) 운항, 호수 범람의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 호수를 오가는 뱃사공들과 주민들은 물의 사고를 막기 위해 마을 입구, 선착장, 다리목에 성 요한 네포무크 성상을 세우고 매일 안전 항해를 기도했습니다.
6) 체스키 크룸로프 ‘이발사의 다리’ 조각상의 각별한 의미
체스키 크룸로프의 이발사의 다리 위에 서 있는 성 요한 네포무크 조각상은 두 가지 중첩된 위로의 의미를 갖습니다.
- 지리적 의미: 블타바강의 잦은 범람으로부터 목조 다리와 건너는 시민들을 보호하는 수호성인.
- 역사적 비극의 치유: 광기 어린 율리우스 왕자의 폭정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발사와 주민들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고 침묵 속에 진실을 지켜준 성자로서 다리 한가운데서 마을을 묵묵히 굽어보고 있습니다.
